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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록

최애, 타오르다 by 우사미 린 (이소담 옮김)

by 곰푸 2022.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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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구는 둥글고.......

일은 끝이 없고.......

그래도 최애는 고귀해!"

 

MZ세대의 자화상?!

처음 책 제목을 보고 '최애'라는 단어가 내가 기존에 알던 '최애'가 맞는지를 반문했다. 내가 알던 '최애'는 덕질을 하거나 팬덤을 일컫는 말인데 그 단어가 이렇게 책의 제목으로 쓰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책의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최애'가 그 '최애'가 맞구나 하고 생각했다. 31살의 나이로 나름 MZ세대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어왔건만 이 책이 "MZ세대의 자화상"을 그렸단 평가에 왜인지 숙연해졌다. 역시나 MZ세대에 한 발 가까워졌다가 두 발 멀어지는 나날이다.

주인공 아카리는 최애를 향한 덕질만이 삶의 의미이자 목표인 소녀다. 존재 자체를 좋아하면 얼굴, 춤, 노래, 말투, 성격, 몸놀림 등 최애와 연관된 모든 것이 좋아진다며, 중을 좋아하면 중이 입은 승복의 터진 실밥까지 사랑스럽다 말하는 아카리. 그런 그녀는 최애와 연관된 것이 아닌 일상들은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남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밥을 먹는 것조차, 몸을 일으키고 씻는 것조차 버거운 그녀.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은 그녀를 불러 일깨우지만 최애와 연관되지 않은 모든 것은 늘 포기하고 놓아버린다. 그게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일 지라도.

아카리가 이토록 최애를 끈질기게 해석하고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던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 했기 때문이다. 아카리에게 최애는 몸의 중심을 잡아주고 고장날 시 거동이 불가한 척추이다. 그래서 아카리의 이런 행동을 보낸 내내 절박함을 느꼈다. 맹목적인 관심을 최애에게 쏟아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어쩌면 아카리의 덕질은 최애가 아닌 자신을 위한 행위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라도 누군가를 위해 감정을 쏟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절박함 말이다.

척추가 사라진 순간, "나"는 과연 무엇인가

여태 살면서 아카리처럼 누군가를 덕질해 본 기억이 있나 떠올려 봤다. 아카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타인을 열렬히 애정해 본 경험. 애석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어느 연예인을 좋아하냐 물으면 대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마저도 마음 속으로 우러나온 답변은 아니었다. '미니언즈'라는 캐릭터를 좋아하긴 하면서도 단지 보면 기분이 좋아질 뿐 '미니언즈'가 없는 내 삶이 상상되지 않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여유가 있으면 굿즈를 사고, 여유가 없으면 "굳이?"라는 느낌.

덕질을 하는 감정과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방적이다. 그래서 아카리의 이런 덕질의 시작과 끝을 최애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며, 아카리의 망가져버린 삶과 추락은 개인에게는 비극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왕을 숭배하거나 영웅적 인물을 우상화했고 이제는 그 시대를 지나 자본주의가 대신 찬양할 수 있는 아이돌로 표방되는 대상을 내세웠다. 아이돌들은 24시간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고, 타인에 의해 왜곡되고, 팬들 자의로 해석되는 "완전한 타인"이자 팬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자신"인 것이다.

아카리는 최애가 연예계 탈퇴 선언을 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돌이 아니게 된 최애를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해석할 수는 없다며 "최애는 인간이 됐다"라고 표현한다. 이 대목이 흥미로웠다. 언제나 과거에도 지금에도 인간이었던 최애를 아카리는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어떻게 인식했기에 최애가 자신과 동일한 인간임을 인식한 순간 일생 동안 해온 자기 혐오와 도피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고작 면봉곽이지만, 자신의 배를 스스로 퍽 때린다. 작품은 그렇게 아카리가 난장판이 된 방 안을 사족보행하며 뼈를 줍듯이 흩어진 면봉을 하나하나 치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딱 흩어진 면봉만큼 최애로 잠식되었던 아카리의 삶에 혁명이 일었다고나 할까.

21세의 나이에 쓴 소설답게 소름돋게 현실감 있는 문체 덕에 단숨에 책을 읽어내려 갔다. 처음 아카리의 기행을 보며 덕질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는 멍청한 소녀의 이야기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오히려 책을 다 읽은 지금 현재 일본과 한국 그리고 곳곳에서 발생하는 젠더 이슈, 나아가 무언가 애착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오늘날 개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척추'가 사라진 순간,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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