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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기록

인현동 화재참사 전말 꼬꼬무

by 곰푸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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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동 화재 참사

씨랜드 화재 참사부터 서해 훼리호 참사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이하 꼬꼬무)를 본 이후로 내가 알지 못했던, 영영 알지 못했을지도 모를 안타까운 인재를 많이 접하게 된다. 4월 7일 꼬꼬무는 1999년 10월 30일 57명의 사망자 대부분이 10대 청소년이었던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를 조명했다. 남겨진 유가족과 친구들의 슬픔에 가슴이 찡하면서도 몇십 년이 거듭되어도 바뀌지 않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들과 프레임 씌우기로 본질을 흐려버리는 행태에 분노가 일었다. 23년 전 인천 인현동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정리해 보았다.

당시 인현동의 인천 청소년들의 핫플레이스였다. PC방부터 노래방, 오락실, 콜라텍까지.  그중에서도 '라이브'란 가게는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그야말로 청소년들의 성지였다. 기말고사가 끝난 아이들은 생일파티를 위해, 시험이 끝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라이브'에 모여 삼삼오오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매캐한 연기가 스멀스멀 공간을 채우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아이들은 '불'이란 것을 직감하고 출입문으로 달려간다.

대형 사상자가 발생한 이유

출입문으로 탈출하려는 아이들을 막아서는 '라이브' 지배인. 계산하기 전까지는 모두 나갈 수 없다며 윽박지르고 그러던 중 이미 1층으로 연결된 계단은 화마에 뒤덮여 출입문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유독가스에 하나 둘 정신을 잃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고자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정전마저 되어버린 상황. 그나마 기절하지 않은 아이들이 비상구처럼 보이는 불빛을 향해 뛰어갔지만 그곳에는 비상구 대신 화장실이 있었다.

3층 당구장에서는 몇몇의 사람들이 창문을 깨고 뛰어내려 탈출했다고 한다. 그보다 낮은 2층 '라이브' 역시 창문이 있었지만 왜 뛰어내리지 못했을까 의아했는데 진실은 생각보다 어이없고 화가 났다. 외관상 창문으로 보였던 곳은 실제로 건물 안쪽에서는 석고보드로 막아 창문이 있는지조차 몰랐고 이를 알고 있던 '라이브' 지배인은 혼자 살겠다고 좁은 환풍구를 통해 도망가 버렸다.

어른들의 욕심이 불러온 인재

인현동 화재 참사는 시작부터 과정, 결말까지 모두 다 인재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처음 불이 난 지하 1층 노래방 역시 불이 날 수밖에 없었을, 삽시간에 큰 화재로 번질 수밖에 없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던 노래방에서는 저렴한 가격의 우레탄폼으로 방염처리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인부들이 페인트 작업을 할 때 쓰던 시너 역시 방치된 채 인화성 물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이를 치우고 있었다.

유증기를 맡아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 그 매캐한 연기와 목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점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르바이트생들은 유증기가 가득 찬 지하 1층에서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켰고 그 순간 폭파와 함께 우레탄폼은 말 그대로 녹아내리며 엄청난 물질의 유독가스인 시안화수소를 내뿜는다. 시안화수소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위해 가스실에 살포할 때 쓰던 독가스의 원료라고 한다.

 

유증기와 라이터가 만들어낸 폭파는 삽시간에 4층짜리 건물을 모조리 태우고 만다. 거의 모든 부분이 다 슬펐지만 마지막에 아이들이 비상구로 탈출하겠다고 달려간 곳이 화장실인 줄도 모른 채 겹쳐지고 포개진 채로 목숨을 잃었단 사실이 가장 처참하게 슬펐다. 마지막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듯 화장실 벽을 가득 채운 손바닥 자국들도 말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찝찝한 부분이 있었다. 어떻게 '라이브'는 무허가 영업에, 청소년을 손님으로 받으며 단속에 걸리지 않았는지, 비상구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버젓이 영업하고 있었는지 등등. 애초에 '라이브'가 어떻게 영업을 하고 있었는지가 의문스러웠다. 머릿속으로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 아니겠지 하고 바랬지만 역시나, 머릿속의 답이 맞았다.

 

당시 '라이브'와 같이 청소년을 상대로 총 8개의 가게를 갖고 있었던 그야말로 청년 재벌이라 불린 정 씨. 그는 관할 경찰서 경찰, 관할 구청 직원 등 공무원 40여 명과 아주 끈끈한 유착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치가 떨렸던 부분은 참사가 발생한 당일 밤, 응급실로 실려온 아이들이 생사를 헤매고 유가족들이 자식의 이름을 울부짖던 그 순간, 구청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허위 보고서를 썼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본질을 흐리는 프레임 씌우기

인현동 화재 참사는 23년 간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수많은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 참사에 '호프집'이란 단어가 끼어들면서 갑자기 참사란 의미는 퇴색되고 불량 청소년에 무게가 실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사람들은 불량 청소년의 부모들이 자식들의 죽음을 이용해 사고 보상금을 더 받으려 한다는 등 그 의미가 변질되고 말았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안다. 어느 부모도 자식의 죽음을 이용해 돈을 얻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불량 청소년들에게 일어난 일이니까란 비겁한 마음에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인현동 화재 참사의 본질은 막을 수 있었던, 아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인재로 인해 10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아직도 자식을 잃고 친구를 잃은 채 1999년 10월 30일에 멈춰버린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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